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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달러] 달러 (USD $) 에 그려진 인물들은 누구일까?

PulseBunny 펄스버니 2019. 12. 10. 21:23

HEY GUYS! 펄스버니 입니다!

이번시간에는 '달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텐데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화폐로 손꼽히는 달러! 세계 어디서든지 인정받는 미국의 화폐입니다. 그 영향력이 큰만큼 여러분들은 한국에 살더라도 달러를 보는일이 많습니다. 특히 해외 여행을 다니는 경우에는 더 더욱 이나 그렇습니다! 근데 여러분들 달러에 그려진 인물들이 누군지 아시나요? 궁금하기는 한데 딱히 스스로 알아내고 싶진 않으시다구요? 그럼 제가 대신 알아봐드리겠습니다! 미국 화폐의 그려진 인물들! 지금 바로 살펴보러 가시겠습니다!

 

 

목차

  • 1달러 : 조지 워싱턴
  • 2달러 : 토머스 제퍼슨
  • 5달러 : 에이브러햄 링컨
  • 10달러 : 알렉산더 해밀턴
  • 20달러 : 앤드루 잭슨
  • 50달러 : 율리시스 그랜트
  • 100달러 : 벤저민 프랭클린

 

 

 

 

1달러 : 조지 워싱턴

 

조지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2.23 ~ 1799.12.14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1797) 입니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의 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많이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들을 수행해나가며, 모두들 그를 미국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유명한 정치인으로 등극했습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도 임명되었습니다.

 

위싱턴은 미국 독립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조약으로 돌깁을 승인 받을때까지 총사령관으로써 복무했습니다. 워싱턴은 한편으론 금방이라도 사라질것같은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없는 군대를 통솔해나가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의 입장을 조율했어야했습니다.

 

1783년 전쟁이 끝난후에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렇게 한다면 , 그는 세계에서 사장 훌륭한 사람이 될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787년 조지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헌법의 초안을 작성키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엉 의회를 주재하였습니다. 이후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써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연방 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만들기도 했죠.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서도 어떠한 간섭을 하지않은 정책을 택하였습니다. 1795냔 워싱턴은 전쟁을 회파하고자 영국과 제이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했었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습니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렵하는 계획을 추친하는 과정해서 국가 부채를 조성 및 조정하였으며, 효율적인 세금제도를 시행해, 국가은행을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였지만 퇴임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 해외 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가담등의 대한 엄중한 경고과 공화주의 적인 덕목을 강조하였습니다.

 

이후 조지 워싱턴은 1799년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도 워싱턴을 "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국민들의 마음속에서도 으뜸 " 이라 칭송받으며 그의 조의를 표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했던 미국대통령중 하나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현재 사용되고있는 1달러 지폐는 그의 초상화가 담겨있습니다.

 

 

 

 

 

2달러 :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4.13 ~ 1826.7.4

 

토머스 제퍼슨, 그는 미국의 정치인으로써 3번째 미국 대통령 ( 1801 ~ 1801 ) 이자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입니다.

제퍼슨은 영향력있는 건국의 아버지중 한사람으로써, 미국 공화주의의 이상을 논의 역대 대통령중 존경 받는 대통령중에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중 일어난 사건은 루이지애나 매입과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원정이였습니다.

제퍼슨은 미국에 공화주의를 뿌리내리는데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의 귀족적 정치 독점 방식은 단점이 많고 시민 사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정이 독립을 가능케 했다고 역설했습니다. 1790년대에 그는 해밀턴과 존 애덤스가 영국의 군주제를 도입하여 공화제를 없애버리려 한다고 몇번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 영국 전쟁을 지지하여 미국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영국이 지배하던 캐나다를 압박하여 캐나다까지 손에 넣을 수있을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제퍼슨이 생각한 미국의 공화주의 이상은 자유농민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농업국가로의 발전이였습니다. 제퍼슨의 이러한 사상은 상업과 공업을 중시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크게 비교되어서, 워싱턴 행정부에서 같이 장관으로 일할때, 꽤나 많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제퍼슨은 특이하고 예외적인것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으며, 후세의 미국인들은 그를 미국 경험주의의 아버지라고 이름붙였습니다.

 

특히 제퍼슨은 아직 인구가 적지만 단결된 미국이 산업화가 되었지만 각 민족으로 분열된 유럽에서 발생한 후유증을 피할수 있을것이다라고 장담했었습니다.

 

제퍼슨의 공화주의적 정치사상은 17세기에 영국 작가들이 창당한 국가당의 이념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인권 양도할수없다고 역설한 존로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역사학자들은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인 장자크 루소도 제퍼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것이라 예상했습니다.

 

 

 

5달러 :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1809.2.12 ~ 1865.4.15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1861년부터 암살되었던 시기인 1865년 4월까지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으로 취임되었었습니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이끌어 벗어나게 하는데 성공했었죠, 연방을 보전하고 노예제도 끝낸 인물이였습니다. 그는 당시 미 북서부 변방 개척지에 사는 가난한 가정출신이였으며, 그는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기보다는 혼자 스스로 할수밖에 없던 상황이라, 줄곧 혼자서 공부했었습니다.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어 일리노이주의 의원이 되기도했으며, 미국 하원의원을 한번했었지만,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두번 실패했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자상한 남편이였고 네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링컨은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습니다, 선거 기간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결과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형 후보 지명을 확보했었죠, 대통령이 된 후에 그는 임기중 일어났던 남북전쟁에서 북부측을 이끌었었으며 연방에서 분리하려 노력했었지만 남부연방의 승리가 되었었습니다.

 

1863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었습니다, 미국 헌법 수정 제 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끈 리더였죠, 대통령으로써 그는 군사적,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하였습니다, 미국 남부 11개의 주의 분리 독립 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 또한 계속 모색했습니다, 그는 전례없는 군사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재판에 넘기지 않고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시켰습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결국 남북전쟁을 북부측의 승리로 이끌어 냈었습니다.

 

역사전문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분파의 지도자를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가 잘 협력하도록 조정했다고합니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랜트호 사건에서도 영구과의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그 사건을 잘 해결하기도 하였으며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 링컨은 1864년에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써 링컨은 모든 방향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공화당 급진파에서는 남부에 대해 더욱 강한 조치를 촉구했었으며,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에서는 평화와 협상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분리독립 주의자들은 링컨을 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링컨은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써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고, 뛰어난 수사학 이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습니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 평등 민주주의 대한 상징이 되었으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날무렵,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보이며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남부연합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의 큰 패배가 있던지 6일 후에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중에 암살 되었습니다.

 

비록 끝은 좋지 않았지만 모든 미국 대통령중 위대한 대통령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영웅,성자,순교자가 된 실제 키만큼의 역사의 거인이라 칭송받고있습니다. 그는 미국 대통령중 최초로 성립당시의 13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상과 더불어, 현재 사용되고있는 미국의 5달러에 그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10달러 : 알렉산더 해밀턴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

1757. 1.11 ~ 1804. 7.12

 

알렉산더 해밀턴, 그는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재정가,정치 사상가 였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하며, 1787냔 미국 헌법의 제정에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초대 워싱턴 정부시절에 재무부 장관을 맡기도 했죠, 알렉산더 해밀턴은 카리브해의 네비스섬,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위그노의 핏줄을 이어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지 워싱턴과 같은 뜻을 하는 연방주의자로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반 연방주의자와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토마스 제퍼슨과 많이 초기 재정 정책으로 대립했었는데, 해밀턴이 독립전쟁때 빚을 모든 주가 공평하게 나눠 내자고 한번면, 제퍼슨은 자신 주의 빚은 자신주가 갚으라고 했습니다.

 

해밀턴의 기반 지역이었던 뉴잉글랜드는 공업 위주 지역이라 빚이 아주 많았는데, 결국 수도를 북부인 뉴욕에서 남부와 북부 경계선쯤에 위치한 워싱턴 DC 로 옮기고 모든 빚을 나눠 갚는다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제퍼슨이 이를 받아 들입니다.

제퍼슨과는 1791년 미국 제 1은행 설립 당시에도 큰 마찰을 빚었습니다.

제퍼슨은 은행 설립에 반대하였으나, 해밀턴은 수정 헌법을 근거로 설립을 주장했었고, 당시 대통령 워싱턴이 해밀턴의 손을 들어줌으로 써 아메리카 합중국 은행을 설립하게 됩니다.

이당시 제퍼슨은 그를 왕당주의라면 강도높게 비판했습니다.

 

워싱턴이 정계에서 물러난 후엔 연방주의자당들은 애덤스 파와 해밀턴 파로 나뉘게 되고 결국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이 승리하며,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의회마저 장악당했습니다.

 

같은 연방주의자였던 존애덤스와도 나중에 서로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두려워 하는 에런 버 대신 토마스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만드는것을 도와주기도 했으나, 1804년 당시 부통령 에런 버와 결투를 벌이다 에런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지만 10달러에는 그의 모습이 담겨져 지금까지 이렇게 그의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있습니다.

여담으로 사후 달러화 인물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과 , 벤저민 프랭클린 뿐입니다.

 

 

 

 

 

 

20달러 : 앤드루 잭슨

 

앤드루 잭슨

Andrew Jackson

1767.3.15 ~ 1845.6.8

 

앤드류잭슨 , 그는 미국의 7번째 대통령 입니다 ( 1829 ~ 1837 ) 그는 미국의 군인으로써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이력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역사상 최초라는 단어가 많이 수렴된 사람입니다. 켈트족의 피를 이어받은 첫 아일랜드 계이기도 하고, 귀족출생이 아닌 최초의 미국 대통령 이기도 하지요. 민주당 소속으로도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독립 13개주와 관계가 없던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또한 잭슨 민주주의 기원을 바탕으로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흑인노예 농장주였습니다.

뉴올리언스 전투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지형지물과 솜 포대를 이용해 진지를 요새화한것이 효과를 거두어 큰전투에서 겨우 아군은 21의 전사자를 나타내고, 영국군은 자그마치 2,037명을 전사시켜 승리를 일구어 냈습니다. 그가 대단한 지략가였을음 나타내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 후 인디언 토벌 이후 영웅으로 떠올라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존 퀸시 애덤스에게 당선을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1828년에 재도전으로 결국 미국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임기가 한참끝난 1845년 6월 8일 78세라는 나이로 꽤나 장수를 하고 하늘로 떠났습니다.

 

영미 전쟁 당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대통령 임기중에 강경 정책을 펴 앤드루 1세라는 야유를 받긴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때부터 남북 전쟁 종전시 까지를 에이지 오브 잭슨 , 잭슨 에라라 부르기도 하며 이름을 크게 날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격때문에 붙은 별명은 올드 히커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50달러 : 율리시스 그랜트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1822.4.27 ~ 1885.7.23

 

율리시스 그랜트, 그는 미국의 18번째 (1869 ~ 1877) 사이의 대통령이자 군 장군이였습니다.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그는 가죽 가공업자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의 딸 한나 심슨의 아들이였습니다. 그랜트는 어려서부터 말수가 굉장히 적었고 혼자 노는것을 좋아했지만, 말솜씨는 뛰어났었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던해, 가업을 물려받는것을 원치 않았던 그랜트에게 아버지는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로의 입학을 권유를 하였고, 그랜트는 이를 받아들여 사관학교로 향하였습니다. 그랜트는 본래 감리교에서 하이럼 율리시스란 이름으로 세례받았는데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오디세이 라는 서적의 등장인물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따 붙여준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율리시스는 이이름을 싫어했고,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 H. 그랜트라고 적곤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할쯤, 그의 서류를 제출한 하의 의원은 그랜트의 가운데 이름을 잊어버려서, 대신 그랜틔 외가 성인 심슨을 차용해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라고 적었습니다. 그랜트는 마음에 들었는지 줄곧 이 이름을 사용하였고, 육군 사관학교에서는 동기들에게 샘 그랜트라고 애칭이 불리웠습니다.

 

그리고 1843년 율리시스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1846년에는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내성적이였던 그랜트는 친구의 여동생 줄리아 덴트와 결혼 한후, 화려했던 군 경력을 지녔음에도 여린 마음에 아내와 떨어져있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진탕 마셔 알콜중독증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로인해 결국 그랜트는 1854년에 군을 퇴역하고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갔고, 아내와 함께 살며 여러가지 사업에도 손을 댓으나,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링컨 암살 사건이후엔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받았고, 앤드루의 권유에 그랜트는 국가 군통수 대원수 겸육군참모총장으로 임관되었습니다.

 

하지만, 존슨은 의회의 탄핵을 받았고 그랜트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눈길을 끌어내 1868년 선거에서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37개주중 26주에서 이겼습니다. 1869년 3월 4일에 대통령이 당선된 그는 1869년 12월 14일을 기점으로 조지 워싱턴 초대 미대통령에게 명예역 미국 육군 원수 계급 추서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랜트는 대통령이 되자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문제에 부딫혔고, 설상가상으로 정부 각료들과 그의 비서들이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 같는 사태, 대규모 금융 스캔들이 터져버렸습니다. 이로인해 전쟁영웅이였던 그의 이미지는 타이밍에 맞지않게 완전히 추락해버렸으나, 그래도 1872년 선거에서 재선되어 많은 국민들이 의아해할 정도였습니다. 

재선 당시 그의 주는 37개주 에서 31개주를 이겼으며 첫 당선시보다 많은 주를 이겼습니다.

 

이후 1879년에 부인과 함께 일본도 방문하였습니다. 우에노 공원에서 환영회가 열리고 자신은 우에노에 삼나무를 심었고, 그의 부인은 목련을 심었는데 이는 일본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임기가 끝나고 난 후 백악관을 떠난 뒤에는 친구 퍼니낸드 워드가 경영하는 중개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다가 사기를 당해 알거지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1884년 파선선언을 하였죠, 같은해 센추리 매거진지에선 남북전쟁 회고담을 쓰기 시작해 자서전을 준비 하였습니다. 이는 그랜트의 사망 직전에 자서전이 완성되었고

 

그 자서전은 미국 군역사상 최고의 자서전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친구 마크 트웨인과 출판 계약을 맺어 당시 화폐로 50만달러의 저작권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허나 파산선언 이후 1년 1885년 7월 23일 후두암으로 향년 6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 5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남겨져있습니다.

 

 

 

 

 

100달러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17 ~ 1790.4.17

 

벤저민 프랭클린 , 그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중 한명입니다. 그는 특별한 공식적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군과의 동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미국 독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계몽 사상가중 한명으로써, 유럽의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피뢰침, 다초점 렌즈등 과학품을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달러화 인물들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알렉선더 해밀턴과 벤저민 뿐입니다.

 

1706년 1월 17일에 보스턴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5번째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은 10살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덕택에 능숙한 인쇄기술을 습득하였고, 또한 글쓰는 솜씨도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1723년 그의 나이 17세일때 프랭클린은 가출을 하였습니다,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가게되었죠.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인쇄업자로써 성공하였고, 1730년에는 24살의 나이로 빠르게 인쇄소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1732년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대중들로 많은 호응을 얻기도했습니다.

 

이후 1731년에는 펜실베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펜실베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되며 1751년부터 1764년 까지 국회 의문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펜실베니아 시 체신장관 대리로도 일하였으며, 그 결과로 전 식민지의 체신장관 대리로써, 우편업무에 관한 사항을 크게 개선시키기도 했습니다.

 

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 프랭클린 고학의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며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는 아직까지도 생상되고있으며, 그 이후에도 기발한 실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것을 증명하기도했습니다. 그는 번개를 구름에서 끌어내기위해 금속으로만든 뾰족한 탑을 세우자고 제안 하기도 하며,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그의 피뢰침이 탄생하게 됩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이 발명품입니다.

 

1753년 ,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곤 코플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죠.이후 펜실베니아의 이익을 위해 교섭을 벌일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의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며 큰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4년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 75년에 귀국하며 제 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니아 대표로 뽑히고 76년에 독립선언 기초 의원으로 임명되어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 프랑스동맹또한 성립시킨 인물입니다.

그렇게 그는 83년 파리조약에 미국 대표의 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많은 발명과 일궈낸 발전으로써 현재까지도 미국과학계에서 전문가들에게 칭송받고있습니다. 특히나 피뢰침은 대단한 발명품으로써 여전히 세상에 널리쓰이고있습니다.

 

그의 업적과 더불어, 벤저민 프랭클린은 100달러 초상화에 남겨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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