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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up everyone! 펄스 버니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남북전쟁에 대해 다루어 볼껍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으로써 "노예제도"를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연합이 나뉘어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던 큰 내전이였는데요,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히 긴 이야기다보니 공겨롭게도 파트로 나뉘게 되었는데요, 앞으로 쭉 이 이야기에 대해 다루어 볼테니 한번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American Civil War

날짜

1861.4.12 ~ 1865.5.9

(4년 3주 6일)

 

장소

미국동부, 미국 북동부, 미국 서부, 대서양

 

교전 결과

북부 연방 승리

 

전쟁 이후

남부연방 붕괴, 미국 영토 무결성 보존, 노예지 폐지, 재건시대 개막, 재건 수정헌법

 

 

각 진영 총사령관

 

북부 : 에이브러햄 링컨

남부 : 제퍼슨 데이비스

 

 

 

 

 

 

목차

  • 1.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 여전히 노예제가 합법인 남부
  • 2.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시작되다.
  • 3. 한계에 닿으려는 갈등.

 

1.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 여전히 노예제가 합법인 남부

미국의 노예폐지 운동은 18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775년에 첫 반 노예제 모임이 필라델피아에서 만들어지고,

펜실베니아 주 의회는 처음으로 노예해방법을 1780년에 통과시켰죠, 이후 4개의 다른 부부주들도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며, 1787년 북서부 영토에서도 북서부 조례를 통해 당시 북부는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이로인해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여전히 노예제를 법으로 인정하는 남부의 두지역으로 나위게 됩니다. 물론 북부에서 노예제를 반대한 이유는 북부측이 인도주의자가 아니라, 농업을 중시하는 남부에 있는 노예들을 분산시켜 그 세력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동시에 북부 공업에 노동력에 힘쓰게 만들기 위함이였습니다.

 

 

 

2.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시작되다


노예제를 금지하는 북부와 노예제를 허용하는 남부가 한땅에 공존함으로써, 이는 갈등을 초례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링컨은 당시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들에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버안을 제안을 하진 않았지만, 1858년에 분열된 집에 대한 연설에서 노예제 확산을 막고 국민의 마음속에 노예제의 궁극적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심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1850년대에 정치적갈등은 새로 생긴 준주로 노예제를 확대할지 여부에 대한 것들이 주된 이야기였습니다.

고로 더욱더 갈등이 심화될수밖에 없었죠, 정부가 수립된 모든 준주는 자유주가 될 가능성이 아주 컷기에 남부는 연방에서 분리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노예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범위가 점점 축소되 결국 폐지될꺼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의 연방정부의 통제권이 넘어갈 것에대한 남부의 우려와 노예제 지지자들이 정부에 휘두르는 영향에 대한 북부의 혐오는 결국 1859년 말에 되서야 위기상황을 일으켰습니다.

 

 

 

3. 한계에 닿으려는 갈등.

 

노예제로 인한 남북 갈등은 시간이가면 갈수록 더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노예제의 도덕적 취약성 때문에 남부의 노예주 의원들은 당을 가리지 않았죠, 노예제 대한 국민들의 청원을 미국 국회에서 토론하는것을 막는 횡포를 부리기도하고, 노예제 밤대 폐지론이 담긴 신문들을 배포하는것을 남부에서 억지로 막았으며, 냇터너 의 반란 이후에는 노예관현법들을 더 잔혹하게 강화했습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의원들을 비판한 찰스 섬너 의원을 구회의사당 내에서 기습적으로 습격,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후드려 패는 민주주의와 정면 대치되는 정신나간 짓또한 했습니다. 민주주의 와 정면 대치되는 남부의 미친짓에 불부주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1850년 탈주노예법 같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탈주노예를 잡기 위해 온 노예 사냥군들에게 협력할것을 강요 하는등 북부 자유주들의 대한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나도 심각했습니다.

 

한편 남부주들은 냇 터너의 반란같은 노예들의 저항 때문에 항상 노예반란을 두려워했고, 북부 노예 반대론자, 폐지론자들이 이런 노예반란을 부채질한다고 생각하며 북부를 매우 혐오했습니다.

 

같은 도주 노예 출신 흑인 노예 폐지론자들의 대두와 앞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같은 반 노예제 문학 작품의 인기로 노예 폐지에 대한 압박이 점차 심해지자 노예제에 대해 남부측은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문제가 있어었는데 자유주와 노예주의 숫자였습니다, 미국은 왠만하면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의 숫자에 밪춰 정치적 밸런스를 유지해왔었지만, 이때문에 미주리 협정이 채결됬는데 한마디로 미주리는 노예주로 하되 북쪽은 자유주 남쪽은 노예주로 하자는것이 그 골짜였습니다. 자유주들이나 불만이 대단했지만,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허나 캘리포니아 등 서부주들의 가입으로 저울이 급속도로 북부측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때문에 몇년뒤 남부와 북부는 캔자스 - 네브래스카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한마디로 미주리 북쪽은 자유주, 캔자스는 투표로 자유주 혹은 노예주가 될껀지 결정하는것인데, 북부주들은 이것은 남부 노예주들의 배신으로 여겨 매우 성을냈죠.

 

그럼에도 캔자스에선 노예제가 인기가 없었고, 그때문에 남부주들에서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적극적으로 캔자스에 이민을 가 노예제 반대론자들을 공격한다, 이때문에 로렌스 학살 등 노예 찬성론자들로 인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고, 이에 분노 한 자유론자들이 반격하는등 노예제 하나때문에 캔자스는 일찌감치 내전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를 피의 캔자스 " bleeding kansas " 로 알려졌습니다.

 

블리딩 캔자스 이후

존 브라운, 그는 원래는 평화로운 노예제 폐지론자였으나, 피의 캔자스 , 찰스 섬너 의원의 피습상태등을 지켜고보고

유혈혁명만이 노예해방의 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선,

아들들과 지지자들을 규합해서 연방 정부의 무장창을 습격해 흑인노예들을 무장시키려고 한 시도 실패를 돌아가는 사간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남부주들은 북부주 인간들이 흑인노예를 자극시켜 인종 대전쟁을 일으켜 우릴 다죽이려한다 라는 의심병이 더 심해지고, 북부자유주들은 중앙정부도 노예제 편이다, 정부를 갈아엎어야한다 라는 의견이 대세 되어가며,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한계에 치닿게 됩니다.

 

이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어떻게서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을 내리는데

 

이 판결 내용을 조금 요약하자면, 미국 내에서 흑인은 남의 자산은 될수 있어도, 시민이 될순없고, 미국은 헌법적으로 노예를 인정하니, 미국연방정부가 연방영토에 노예제를 금지할수 없다. 노예주들은 노예주든 자유주든 맘대로 가져갈수있다. 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판결은 일부 북부주에서 흑인을 주시민으로 인정한다는걸 무시한 처사였으며, 미국연방이 노예제를 일부 연방영토 및 해상에서 금지한 사례 또한 무시했고 , 미국은 그냥 노예국가라는걸 연방 대법원이 인증해버린 꼴이 나

이는 자유주들에게 반박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을 근거로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자들 역시 노예제에 대해서 중앙정부에 굽힐 의사가 없다는걸 확신했죠.

 

미친듯이 싸우는 자유주와 노예주들이 반목하면서 대망의 1860년 대선이 열립니다.

대선중에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싸웠지만 결국 대선에서 승리한 사람은 링컨이였으며,

링컨은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열쇠를 가진사람이였습니다.

 

남부주들은 장기적으로 공화당 같은 북부의 공세에 노예제가 종말을 맞이할수밖에 없다는것을 느꼇죠.

그리하여 남부주들은 링컨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도 전 소식을 듣자마자 연방정부의 조폐국에 있던 금을 훔치고, 연방정부의 항구와 요새들을 점령하고, 친 연방정부 성향의 정치인들을 폭력으로 쫒아내 군대를 모집하는등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링컨은 첫번째 취임식 연설에서 남부 노예주들의 명백한 반란 활동들은 무력으로 불사해서라도 진압할것을 경고하면서도 헌법적으로 본인은 남부 내 노예제에 대해 간섭할 생각이 없으니 연방으로 돌아오라고 남부 노예주들을 설득 시도했으나, 결국 같은 취임식 연설에서 링컨은 연방 영태내 노예제폐지에 대해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남부주들이 원했던건 최소한 연방영토에서 노예제가 허용되는것이였고, 더 나아가서 자기들처럼 북부도 스스로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 언론 통제하는걸 원했지만 결국 이 양측간에 대립이 격돌해

 

남부연맹층에서 연방정부의 영토였던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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